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트 2세 (문단 편집) === 페르디난트 2세를 둘러싼 당시 독일의 딜레마 === 문제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상황이었다. 유럽 중앙에 위치한 이 제국은 [[가톨릭]]이 부여한 정당성에 의해서, 각 지방이 하나로 묶여있는 느슨한 봉건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가톨릭의 권위를 빌리는 투표를 통해 제국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신성한 황제를 뽑고, 앞의 권위주의 체제를 통하여 온갖 정치가 통합되는 기묘한 형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하필이면 그 유명한 [[종교 개혁]]이 일어난 지역도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이 있는 독일 지방이었다. 즉, 수없이 많은 유력 제후 가문들의 연합 형태인 독일 지방을 묶어주던 유일한 이념이었던 '가톨릭'을 비판하는 세력이 하필이면 바로 그 독일 땅에서 큰 세력을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전체의 황제 선출권을 지닌 선제후들도 구교:신교의 선제후들이 60:40으로 갈라진[* 어차피 성속 제후인 [[마인츠 선제후국|마인츠]], [[쾰른 선제후국|쾰른]], [[트리어 선제후국|트리어]] 대주교는 가톨릭이었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준세습하던 보헤미아 왕국도 가톨릭이었다. [[작센 선제후국]]은 [[루터파]]였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단, 당시 선제후였던 [[요한 지기스문트]]가 율리히-베르크-클레베 상속 분쟁에서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의 지원을 얻기 위한 개종이었던지라 브란덴부르크 백성들은 대부분 루터파였다.]와 [[팔츠 선제후국]]은 [[칼뱅파]]였다.] 일촉즉발인 상황에서, 그는 새로운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가 즉위한 보헤미아 왕국의 민중 대다수는 신교였다. 반면에 페르디난트 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데다, 신교도들에게 관용적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우 싫어하며 핍박하고 몰아낸 강압적인 인물이었다. 결국, 보헤미아 지방의 신교도 주민들은 그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자신의 재산을 빼앗길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여 곧장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0년 전쟁 자체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신교도 자유도시 vs 국가의 통합과 군사확장에 더 신경쓰는 가톨릭 보수귀족들의 경제적인 대립에 가까운 성향도 짙었기에, 페르디난트 2세가 무작정 신교도들의 재산을 빼앗고 쫓아냈던 경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업도시가 많았던 해당 지역의 반란의 동기가 될 수 있었다.] 즉, 골수 가톨릭인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도가 많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한다는 사건 자체만으로도, 당시 유럽 사회를 좀먹던 종교대립이 피를 흘리는 진짜 전쟁으로 바뀔 수 밖에 없는 시발점을 제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